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폰 프로이센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과 말년 === 1940년 빌헬름의 장남 빌헬름이 [[프랑스 침공]] 도중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했다. 장례식장에는 5만명이 모여 애도하며 독일 군주제 복귀 여론의 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확인시켰다. 이에 나치 지도부는 법을 제정해 모든 구 왕족의 군대 예편을 명령했다. 1941년에 아버지 빌헬름 2세가 사망하자 빌헬름이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체칠리엔 호프라는 궁전에서 머물렀고,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자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았다. 1945년 본인의 건강이 악화되자 포츠담을 떠나 알프스 지역으로 요양을 가게 된다. 붉은 군대가 서진해 오자 체칠리엔 호프는 버려졌고 [[포츠담 회담|영국/미국/소련의 전후처리 회의]]의 회의장로 사용된다. 전쟁이 끝날 무렵 연합군 소속의 [[자유 프랑스]] 모로코군에게 체포되었는데, 사유는 다름아닌 [[뒤끝|'''1차 대전의 전범'''이라는 이유였다.(...)]] 정작 1차대전 패전 직후 부황 [[빌헬름 2세]]를 포함한 당대 패전국 군주들은 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다만 빌헬름 2세나 [[불가리아 왕국]]의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와는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 1세]]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6세]]의 경우에는 책임을 묻기가 힘든데, 둘은 한참 세계대전이 치러지는 도중에 즉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를 1세는 오히려 조기 종전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고(그래서 협상국 내에서도 그를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이 소수나마 있었다.) 메흐메트 6세는 전임 황제 [[메흐메트 5세]]처럼 허수아비였다.][* 여동생 [[빅토리아 루이제]]는 오빠와 정반대로 6촌 동생인 '''[[조지 6세]]의 지시를 받은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소련군의 진주를 피해 영국군 점령지로 피신했다.] 체포 이후 얼마 안가 풀려났지만 헤힝겐으로 이사하기 전에 머물렀던 호엔촐레른 성에서 반경 25km를 벗어날 수 없는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다.(...) 얼마 안가서 가택연금도 해제되었다. 헤힝겐에 있는 방 5개 자리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